숨연구소/安哲(안철)

생명이야기2 - 교회1 / 김정관

▪살림문화재단▪ 2013. 6. 2. 02:57


생명이야기2 - 교회1 / 김정관


  교회 다녀와서 한솔이는 예배 끝나면서 꼭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를 드렸다면서 왜? 이 기도를 드려야 하느냐고 따지듯 묻는다. 아무 생각 없이 외우는 기도문이 무슨 기도냐는 것이다. 

 딸, 나의 사랑스런 딸아. 믿음은 순종이라 했는데 순종하지 못하고 자꾸 의심하는 한솔이 너는 믿음이 없는 아이임이 틀림없구나. 그런데 믿음이 없는 딸이 아빠인 나는 왜 이다지도 대견스럽단 말인가. 나도 한솔이처럼 믿음이 없나보다.

 

교회에 대한 믿음, 교회에 대한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과 나와 만나는 것은 교회라는 장소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한솔이 왈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엉터리가 많다는 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을 어른들은 예수 이름으로, 하느님 뜻이라는 알 수 없는 말로 어른들의 행동은 이성을 잃은 행동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이해 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리 딸도 이단자이구나. 아빠처럼. 

 


  한솔이는 아빠인 내가 한심하다는 투로 “ 아빠는 이런 것들을 믿어 ” “ 왜 교회 가는 건데” “헌금은 왜 꼭 교회에다가만 해야 하는데” 도전적인 한솔이에게 무슨 말로 답해야 하나? 아빠는 딸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양심을 속인다는 것은 더욱 아니 될 일이고 . 한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가 아닌가? 남감 할 수밖에. 40년을 시계불알처럼 교회라는 곳을 왔다 갔다 했던 내가 아니가. 교회, 교회가 어떤 곳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 곳인가. 

 


  지금 한국교회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주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단 말인가? 한국교회가 가난한 자의 아픔보다 자기 교회 부흥과 발전을, 농촌 가난한 교회 관심보다는 교회 일 년 예산에 더 큰 관심을, 이웃의 아픔보다는 교회건축과 치장의 교회 선교목적으로 삼고 있는데 어찌 아무런 회개 없이 주의 기도를 드릴 자격이 있단 말인가?  

16세기 조요개혁자들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한다” 고 주장했다. 교회는 교의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모인 종말론적인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들의 자의적인 모임이 아니다. 따라서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사회”가 아니다.  이점에서 교회는 예수를 증언해야하고(케리그마), 이웃과 서로 함께 참여하고 나누고 친고해야하고(코이노니아), 세상을 섬기고 이웃에게 봉사(디아코니아)를 해야 한다. 그러 할 때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고 존재 할 이유와 가치가 있다.

 

하느님은 역사와 함께 존재한다. 신의 섭리는 이 땅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이웃들에게. 그러므로 그 존재가“생명이 있는 존재<Living being>인 것이다. 이 존재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그의 뜻을 ”지금, 여기서“ 실현시키시는 조직체가 교회이다. 하늘을 위해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위해 더 구체적으로 땅의 모든 생명들의 구원을 위해 죽임을 살림으로 바꾸어 가기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변한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자기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완성해야 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항상 개혁대상이며 개혁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교회는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세상)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할 때 하느님은 교회를 심판하신다.  교회가 인간을 위해서 생명의 살림과 구원을 위해 있는 그것이 교회의 현존성이다. 

 


   한국교회여! 개혁할 수 없는가? 가난해질 수 없는가? 하는 희망으로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촉구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 예언자적인 모습과 사명이 무엇일까? 예수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를 살펴보며 교회의 본질과 썩고 병든 상처를 들추어 보고자 한다.  김지하는 자신의 현주소를 이렇게 고백한다.

 “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가끔은/ 후배들 놀려와/ 고담준론도 질퍽하게/ 아아/ 무엇이 아쉬우랴만/ 문득 깨닫는다/ 죽음의 날이 사뭇 가깝다는 것. ”<시집, 유목과 은둔. 92쪽> 얼마나 솔직한 고백인가? 또 옛주소 라는 시에서는 “ 컴컴한 사창가 언저리를/ 배회하다 배회하다.-----불꺼진 자취방에 슬그머니 돌아와/ 어둠속에서 수음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김지하의 고백이고 기도요. 고회성사가 아닐까. 한국교회도 이런 솔직한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라고 소리 높여 기도한다. 그런데 어떠한가. 하느님의 이름보다 인간의 이름을 맘몬의 이름을, 교회의 이름을 인간 목사의 이름을 부르며 더 빛나고 거룩하게 하려고 찬양하고 우상화하고 있지 않는가? 국민보다 정권과 정당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 사회의 잘못을 닮아 가며 교회의 연합사업 조차도 하느님의 이름보다는 내 교단(내 교회)의 이름을, 하느님의 영광보다도 나 자신의 영예에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하느님 앞에 교인들 앞에 목회자들이 솔직해져야 할 때, 회개해야 할 때.

 


   우리는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라고 소리 높여 기도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평화(샬롬)와 사랑(에로스, 아카페)이 넘치고 이웃과 더불어 자유의 삶을 누리며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드린다. 그러나 그건 기도와 설교뿐 기독인의 바램은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라는 타개주의와 기복신앙의 사로잡혀왔다. 지금도 그러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이 땅, 이 사회, 이 역사, 민족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무책임해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또 이렇게 기도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는 아버지(하느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내 뜻, 내 구원, 내 복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가? 내 교회, 내 교단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이른 새벽부터 극성을 부리며 기도하지 않는가? 선교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도 아니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이다. 예수님 자신의 선교로 돌아가는 것, 선교의 주체자는 하느님이다. 나와 교회는 도구일 뿐이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나를 위해 있는 곳도 아니다. 이 땅이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 땅을 위해 있는 것이다. 왜 있느냐면 이 땅을 섬기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 교회는 하느님의 교회가 아닌 사교집단이며, 이익집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섬기고 봉사하는 길을 찾아야하며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보다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 사명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