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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김재준

▪살림문화재단▪ 2013. 8. 13. 10:53

 

장공 김재준 / 한신대학교 설립자

‘현대사 호랑이’들 키워낸 자유혼 
  
» 장공 김재준서울 강북구 수유동 도봉산 아래 한신대 대학원 캠퍼스가 있다. 설립자인 장공 김재준(1901~87·사진)이 깃든 지령인 때문인가. 몇 발자국 밖은 소란한 도시인데 캠퍼스는 깊은 산의 수도원 같다. 

이곳 대학원장을 지낸 김경재(67) 명예교수가 1959년 처음 한신대에 입학해 교실에서 보았던 장공을 회상한다. 장공은 칠판에 어려운 한시를 거침없이 쓸 만큼 동서양의 학문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에겐 특정 학파와 이론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강의는 가슴을 툭 트이게 했다.

동서양·보수진보 초월…장준하 문익환 안병무의 스승
기독교장로회 출범 이끌고 민주화운동 버팀목 구실

“아!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혼이 되는 것이구나!”

김경재는 그날 이후 장공을 ‘사부’로 모셨다. 그에 앞서 이미 20년 전부터 장공을 삶의 스승으로 모신 이들이 있었다. 장준하, 문익환, 안병무, 강원용 등이었다.

그런 새끼 호랑이들이 깃들 만한 품도 애초부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20대 초반까지도 장공은 고향 함북의 경흥 인근 회령군청 말단 직원과 웅기금융조합 직원으로 일하던 시골 청년이었다. 유가적 가풍에서 아홉 살 때 〈논어〉와 〈맹자〉를 모두 암송할 만큼 한학 공부를 하긴 했지만, 조국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한 채 이미 혼인까지 해 평범한 삶을 살던 백면서생이었다. 그런 그를 깨워 새 삶을 살게 한 것은 동향 선배 송창근(목사)이었다. 훗날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는 그의 교육관은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상경해 중동중학교와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신지식을 습득하던 장공은 당대의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거듭남을 체험했다. 장공은 1924년 고향으로 내려가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일본행 배에 올랐다. 단돈 5원50전으로 떠난 무모한 유학이었다. 선배 송창근의 기숙사 방에 숨어 살며,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던 식민지국의 고학생은 추운 겨울에도 스팀 하나 없는 다다미방에서 헌 외투 하나로 버티며 공부했다.

그는 일본에서 3년, 이어 미국에서 4년간 주경야독의 고학생으로 지냈지만 본토 학생들도 놀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더 주목할 만한 일은 일본에서 대표적으로 진보적 학풍을 지닌 아오야마(청산학원)에서 배운 그가 미국에선 당시 보수 신학의 총본산인 프린스턴신학교에 진학해 근본주의 신학의 총사 그레셤 메이천 박사의 강의를 주로 택해 들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애초부터 한쪽은 배제하고 한쪽만을 학습한 것과 달리 진보와 보수를 망라해 신학을 골고루 접한 뒤 자신의 신학관을 정립한 셈이다.

귀국 뒤 그는 조만식 선생이 설립한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거쳐 김약연이 세운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후학을 길러냈다. 당시 학생이던 강원용은 “장공은 학교에서 한달에 70원의 봉급을 받았는데, 그 중 22원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고학하는 학생들의 뒤를 보살피는 데 썼고 자신은 다 떨어진 옷을 꿰매 입고 다녔다”고 회고하곤 했다.

미국 선교사들에게 예속된 신학이 아니라 이 땅의 역사와 정신문화의 전통에 그리스도 정신을 접맥하려던 그의 꿈은 1939년부터 조선신학원 설립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공은 훗날 수십 개가 넘는 교단으로 분열되고 만 장로교 교권의 종교재판에 의해 큰 위기에 직면한다. ‘성서 무오류설’과 관념적 교리의 도그마로 신학적 우민 정책을 펴고 있다고 주장했던 그의 성서 해석을 문제 삼은 교권에 의해 교수직과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교단에서 축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장공의 인격과 학덕을 흠모한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그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했다. 하지만 장공은 5·16 쿠데타 세력이 총학장 연령을 60살까지로 못박는 바람에 올바른 신학교육의 꿈을 채 펴보지도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집권을 꾀한 이후 장공은 1971년 결성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로서, 10년간 미주에 망명생활을 하면서는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북미본부’(한민통) 의장으로서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 되었다.

장공은 눈을 감기 전 “그리스도께서 평생 동행해주었다”고 고백할 만큼 확고한 신앙인이었으나 이 땅의 환단문화와 전통 유·불·선 정신문화, 그리고 이 땅의 역사를 사랑했다. 기독교의 정수를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로 본 그가 품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는 왜소하고 소박했으나 범들을 품어 날게 했고, 좀체 말이 없고 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것이 그의 영성이 지닌 신비였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7년 5월 2일자)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울림-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 (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