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살림단상(한국타임즈)

기억하지 않는 2등은 의미 없을까?

▪살림문화재단▪ 2014. 1. 10. 11:08

 

  김예명 살림단상칼럼니스트

기억하지 않는 2등은 의미 없을까?

 

                                                                                                                 김 예 명 ( 관찰과 상상력 대표 )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수 년 전 한 재벌 기업의 이미지 광고에 나온 이 문구는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국내 최고의 자리를 뛰어넘어 세계 일류가 되고자 했던 기업의 의지로만 읽는다면야 문제될 게 없었지만, 1등이 되지 못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비수에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광고의 화제는 개그 프로그램으로 옮겨 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로 확산되었고, 이 한 마디를 날릴 때마다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 속엔 ‘죽었다 깨어나도’ 1등에는 끼지 못 한다는 자포자기와 낙담 또한 배어 있으니 통쾌함이라고 해봐야 순간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1등만’이라는 이 한정도 사실 잘못되었다. 우리는 1등은커녕 2등, 3등, 4등조차도 해보지 못 하는 흔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이니까.

 

 

이런 사람들을 나는 ‘세컨드 와인’에 비유하고 싶다.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생산하는 것들에 명품이 많은데, 그 명품 와인의 아우뻘 되는 것이 세컨드 와인이다. 프랑스에서는 1855년 특급 와인의 분류가 공식화되었다. 이에 따라 특급 와인은 전체 포도밭의 20% 정도에서만 지정되었는데, 특급을 만들기엔 포도의 품질이 떨어지지만 맛과 향은 특급과 어금지금, 가격은 훨씬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6, 70년대엔 ‘슈퍼 세컨드 와인’이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등급 분류가 이미 공식화돼서 그 안엔 들어가지 못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포도 품질이 좋아져서 1등급을 능가하거나 거의 육박하는 샤토의 와인을 말한다.

 

 

능력이란 타고나는 바탕에 노력이 더해져 진가를 얻는 게 아니던가. 나는 타고난 유전자가 좀 더 우수한 사람이 1등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를 가르쳤는데 열을 알아버리는 비상한 머리들이 있지 않은가. 특급 와인을 만드는 포도도 좋은 품질을 만드는 수고로운 손길의 힘이 크지만, 토양과 햇빛과 바람이라는 자연 환경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고가의 특급 와인은 좀처럼 맛보기 힘든 세계라 치고 1등은커녕 2등, 3등, 4등조차도 되기 힘든 ‘흔하고 일반적인’ 대부분의 노력형 사람들이 축하나 기념의 분위기를 내기엔 세컨드 와인이 제격이다. 그런 자리에서 주인공은 와인이 아니므로.

 

 

나는 우리 사는 세상이 더 많은 흔하고 일반적인 상황이어야 한다고 본다. 작고한 문인 고 박완서 선생도 ‘꼴찌에게 갈채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흔하고 일반적인 상황은 1등도 아니지만 꼴찌도 아니다. 가장 기쁠 1등과 가장 슬플 꼴찌 사이의 중간 지점, 그 공간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대부분 살고 있고 비슷비슷한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 희로애락을 겪고 산다. 진정한 갈채를 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중간 공간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들이다. 그 대부분의 우리들이 세상을 이루면서 무언가를 만들고 발전시켜 가고 완성시켜 가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등수를 생각하며 사는 삶은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그 피곤함을 보여주는 실험도 있다. 미국 코넬 대학에서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 때 금, 은, 동메달을 받은 선수들 표정을 비교 분석하였다. 금메달 선수의 표정은 당연히 행복.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의 득의만만한 승리감일 게다. 동메달 선수도 의외로 행복. 하마터면 시상대에 오르지 못 할 뻔 했는데 등수 안에 들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행복이다. 가장 불행한 표정이 은메달 선수. 금메달 선수를 보며 나도 1등을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과 후회에서 오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기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과에 대한 만족도는 이처럼 달라진다. 올 한 해 우리는 어디를 보고 살 것인가? 나의 기대치를 어디에 두고 의미 부여할 것인가? 계절도 시국도 한창 겨울이다. 내 마음 따뜻하게 보살피면서 튼튼한 일상을 만들어 줄 나만의 꿈을 품어야 하는 시절, 나를 위해 세컨드 와인 한 잔 하는 날 만들어 볼 일이다.

 

[원글바로가기]http://blog.daum.net/yiwoosong/13483512

       e-mail:  munch-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