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살림의 문화를 깨우는 사람들

‘모시고’ 살지 말고 ‘사용’하자 / 살림이야기에서

▪살림문화재단▪ 2015. 8. 1. 00:11

[ 게으른 나의 냉장고 다이어트 ]

 

‘모시고’ 살지 말고 ‘사용’하자

글 김선미

올해로 7년째 쓰고 있는 우리 집 냉장고 용량은 347ℓ다. 전에 쓰던 냉장고보다 작은 것을 찾느라 나름 고생깨나 해서 구입한 제품이다. 냉장고 용량이 점점 커지는 시류를 거슬러 작은 냉장고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렵게 고른 작은 냉장고가 마음에 쏙 들어 내심 자랑스럽다. 그런데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마다 네 식구 살림에 냉장고가 너무 작은 거 아니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답하는 마음으로 ‘나의 냉장고 다이어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냉장고를 채우려고 일하지만정작 집밥 먹기 힘들어

22년 전, 내가 태어나 처음 골라 산 냉장고는 ‘탱크’라는 브랜드 제품 가운데 가장 큰 사이즈였다. 500ℓ 이상 냉장고가 막 시장에 등장하면서 대형 가전제품 판촉 경쟁이 불붙기 시작한 때였다. 결혼하면서 장만한 혼수라고 해 봐야 장롱, 냉장고 그리고 직접 디자인 한 2인용 원목 책상이 전부였는데, “냉장고만은 크면 좋겠다.”는 시어머니의 바람 때문에 당시로선 제법 큰 것을 샀다. 제사를 신앙처럼 모시며 오랜 세월 대가족을 건사해 온 시어머니는 살림하는 손이 컸고, 늘 쌀독과 냉장고를 가득 채워 놓아야 안심이 되는 분이었다. 덕분에 나는 거실과 부엌이 분리되지 않은 좁은 신혼집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냉장고를 ‘모시고’ 살림을 시작했다. 결혼하자마자 곧바로 아이가 들어섰고 산달까지 직장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입덧이 너무 심해 요리며 살림하는 재미라곤 통느껴 보질 못했다. 이런 초보 불량 주부에게 큰 냉장고는 좁은 집안을 장악한 점령군처럼 여겨졌다.

아이들이 태어나 식구가 늘고 집도 차츰 넓어지면서 엄청 크다고 여겼던 냉장고는 상대적으로 왜소해졌다. 900~1천ℓ에 이르는 초대형 냉장고가 대세인 세상이니 격세지감마저 느껴졌다. 그사이 이웃들의 부엌에는 거의 양문형 냉장고로 세대교체가 일어났고,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운 식품도 빠르게 ‘세계화’되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 초대형 냉장고의 유행은 유통시장 개방과 함께 신도시를 중심으로 대형 할인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는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 자가용을 타고 대형 할인점으로 달려가 쇼핑카트 가득 일주일치 먹을거리를 사서 냉장고 가득 쟁여 두는 일이 또래 주부들의 흔한 일상이었다. 냉장고 용량이 커지고 대용량 포장이나 묶음 판매 식품, 냉동과일 소비가 늘어나는 것도 그렇게 연결돼 있었다. 자연히 오래 보관하는 식품의 양과 종류가 늘어나니 시장에는냉장고 정리 용기라는 새로운 소비재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커다란 냉장고를 가득 채우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정작 일주일에 서너 번도 집밥을 먹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혼수로 초대형 냉장고를 장만한 후배들 가운데도 집에서 꼬박꼬박 아침밥을 먹는다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는 출퇴근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거의 급식으로 점심을 해결하니 예전처럼 도시락을 쌀 일도 드물다.

외식과 배달음식 소비가 늘고 있는데도 집집마다 냉장고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저장식품은 쌓여 가고 덩달아 음식물 쓰레기의 양도 늘어만 가는데, 과연 냉장고 용량이 커진 만큼 우리도 행복해졌을까? 신혼 때부터 써온 첫 번째 냉장고의 수명이 다할 때쯤, 굳이 더 작은 냉장고로 바꿔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나는 520ℓ짜리 첫 번째 냉장고도 가득 채워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오래된 식재료들을 내다 버려야 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냉장고를 청소할 때마다 게으르고 즉흥적인 나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럽고 스스로에게 화도 났다.

그래, 냉장고부터 줄이자! 많이 쟁여 둘 수 없으니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구입해 신선한 식품을 알뜰하게 먹자. 밥상은 더 건강해지고 살림도 경제적으로 꾸릴 수 있으리라. 전기요금까지 줄어드니 일석삼조는 되지 않을까? ‘더 소박하고 간소하게!’ 늘 구호처럼 외치던 말들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냉장고 다이어트’부터 실천해야겠다 싶었다. 이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나는 내심 뿌듯해 하면서, 이사를 빌미로 15년 만에 냉장고를 바꾸었다.

마음에 쏙 드는 우리집 냉장고. 신혼 때부터 써 온 냉장고가 수명이 다할 때 이 작은 냉장고를 샀다.

곳곳마다 큰 냉장고만 팔아 347L짜리 냉장고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혼자 들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장보기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혼자 사는 친정엄마는 오히려 우리 집 냉장고보다 두 배나 큰 양문형 냉장고를 새로 들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대형 김치냉장고까지 장만했다. 처음에는 엄마의 냉장고를 보면서 어줍지 않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제 장아찌 같은 거 그만 만들고 그냥 신선할 때 드세요.”

엄마는 냉장고 가득 온갖 장아찌와 설탕에 절인 오디나 산딸기, 갖가지 김치들을 가득 채워 놓고 부자가 된 듯 흐뭇해하신다. 정작 당신은 고혈압과 당뇨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마음껏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쌓아만 두면서 말이다. 몇 해 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댁에 있던 냉장고 두 대에서 먹을거리를 꺼내 버려야 했던 때 가슴이 아팠다. 맛나고 좋은 음식을 당신이 먹자고 쌓아 두는 게 아니었다. 자식들 올 때 먹이려고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둔 것들은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대부분 기한이 지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했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자식들 입에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길 바라는 늙은 어머니들의 열망이 컴컴한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거나 썩어 가고 있을 것이다. 궁핍한 시대를 어렵게 건너온 세대의 마음은 그렇게 냉장고에 투영돼 있다.

노인들이 큰 냉장고를 채워서라도 공허한 삶을 위로받고 싶어 하는 것까지 뭐라 하기는 어렵다. 다이어트를 실패로 몰고 가는 ‘요요현상’도 수만 년 동안 우리 몸의 유전자에 각인된 굶주림의 기억 때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갑자기 음식물 섭취가 줄어들면 인체의 위기대응 체계가 작동해 섭취하는 양분을 부지런히 지방으로 축적하는 게 자연스런 일이라고 한다.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도시에서는 어디든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마트가 있으니, 굳이 멀리 차를 몰고 가서 한 번에 많은 양의 식품을 사다가 쟁여 둘 필요가 없다. 아침에 스마트폰으로 장을 봐 주문하면 저녁밥 차리기 전에 총알처럼 현관문 앞에 배송되는 세상이다. 큰 냉장고가 과연 꼭 필요한 것인가? 더구나 냉동음식은 건강에도 해롭다는데.

나는 요즘 집에서 1.7km 떨어진 한살림매장까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장바구니만 들고 걸어가는 일을 운동 삼아 즐기고 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을버스를 타지만, 냉장고가 적어 혼자 들 수 있는 만큼만 장을 봐야지 넘치게 욕심을 부릴 수도 없다. 자연히 냉장고 속 식재료의 순환주기는 빨라졌고, 먹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음식의 양은 확연히 줄었다. 나처럼 게으르고 의지박약한 사람에게는 작은 냉장고가 안성맞춤이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 줘야 하는 막내도 머잖아 독립할 테고, 우리 부부만 남게 될 식탁은 더 단순해질 것이다. 나이 들수록 적게 먹어야 건강하다니, 언젠가 이 작은 냉장고마저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냉장고는 작아져도 사랑하는 이들과 둘러앉아 밥 한 끼를 나누는 따뜻한 마음만은 늘 넉넉한, 그런 노년이었으면 한다.

 

 

↘ 김선미 님은 《살림이야기》 전 편집위원이었고,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이야기들을 펴내고 있는 작가입니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 《살림의 밥상》, 《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 《산이 아이들을 살린다》, 《어른》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