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살림의 문화를 깨우는 사람들

식당밥보다 집밥, 집밥보다 들밥 / 살림이야기에서

▪살림문화재단▪ 2015. 8. 1. 00:22

[ 옛 농부들의 농사이야기-보릿고개 넘기던 음식 ]

 

식당밥보다 집밥, 집밥보다 들밥

글 전희식 \ 그림 전새날

여름은 낮이 길어 하루가 참 더디다. 우리 집에서 연 ‘자연농장 농부교실’에 온 사람들이 새참으로 수제비를 먹자고 했다. 새벽 5시면 날이 훤하게 새고 밤 8시나 되어야 어둑발이 지는 여름은 겨울에 비해 낮이 두 배는 길다 보니 새참을 거를 수 없다. 무더위에는 찬 성질을 지닌 밀가루 음식이 좋다며 다들 수제비를 원했다. 수제비. 말만 들어도 양 어금니 사이로 신 김치 냄새가 풍긴다. 어릴 적 배곯던 기억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 강렬해서다.

 

 

 

풋보리 풀떼죽·수제비·보리밥

“호랑이가 나오는 범재(범고개)보다 더 무서운 게 보릿고개”라고 했는데 이때를 보리누름이라고도 불렀다. 보리가 누렇게 익는다고 그렇게 불렀다. 먹을 게 없어서 노란 감꽃을 주워 먹기도 하던 때다.

덜 익은 풋보리를 한 소쿠리 베어다 가마솥에 찌고 절구에 찧어 밥을 해 먹고 아니면 물을 한 바가지나 붓고 ‘풀떼죽’을 끓여 먹다가 드디어 밀과 보리를 거두어들이면 갑자기 밥상 위에는 보리밥과 수제비가 삼시세끼를 장식했다.

내가 어린아이였던 1970년대, 어머니는 군내가 나기 시작한 김치를 물에 헹구어 찢어 넣고 감자를 썩둑썩둑 썰어 넣은 뒤,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동생을 등에 업은 채 수제비를 뜯어 넣었다. 발바닥으로 부엌 바닥을 탁탁 차면서 어머니는 내게 고무신 타는 냄새도 안 나느냐며 어서 불 밀어 넣으라고 고함을 치곤 하셨다. 솥의 물이 끓기 시작하면 신 김치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면서 수제비가 익어 갔다. 어른이 되어서도 수제비만 보면 신 김치 냄새부터 났던 이유가 이것이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번져가던 보릿대 불길도 생각나고 연기를 마시면서 수제비 뜨느라 잔뜩 찌푸린 어머니 코 끝에서 대롱거리던 콧물도 떠오른다. 그놈의 수제비 정말 징그러웠다.

요즘이야 뭘 먹을지 한참 고르지만 옛날에는 고르고 자시고 할 수가 없었다. 뭣이든 먹을 게 없었다.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식구가 많다 보니 늘 양식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늦봄에 피는 이팝나무꽃이 멀리서 보면 소복하게 담긴 하얀 쌀밥 같다고 하여 이팝(이밥, 쌀밥)나무라 했겠는가. 보기에 따라 백설기에 완두콩이 박힌 것 같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만큼 모든 것이 먹는 문제와 연결되었다.

들에서 일하다가도 “보리쌀 삶으러 간다.” 고 일찍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아낙네들은 보리쌀을 박박 씻어 ‘곱삶이’를 했다. 곱삶이란 두 번 삶아 먹는다는 말이다. 보리쌀은 거칠고 물이 잘 스미지 않아 쌀과 바로 섞어 밥을 지을 수가 없어서다. 이렇게 보리쌀이라도 있는 집은 그래도 곱삶이 밥(꽁보리밥)을 찬 물에 말아서 새참으로 먹기도 했다. 호박잎을 데쳐서 된장에 찍어 반찬 삼았다. 꽁보리밥에 감자나 고구마를 올려 밥을 지으면 밥그릇마다 역시 감자나 고구마가 하나씩 얹히곤 했다. 이마저도 없는 집은 부잣집 보리방아 찧을 때 방앗간에 가서 일해 주고는 보리등겨를 얻어다가 물에 반죽해 구워 먹기도 했다.이를 보리개떡이라고 하는데 진기가 전혀 없고 씹으면 입안이 버석거려서 그냥 삼킬 수가 없었다. 보리개떡 한 입에 물 한 모금씩을 새참으로 먹기도 했다.

유두절 논꼬시 빼 먹기

영양가 없는 섬유질만 줄기차게 먹다 보니 가난한 집 아이들은 배만 불룩하게 솟구쳐서 흔히 TV에서 보는 아프리카 난민처럼 체형이 변하기도 했다. 얼굴이 누렇게 뜨는 부황 든 사람들이 꽤 많았다. 소나무 속 껍질을 벗겨 내서 꽁보리밥 밑에 깔아 밥해 먹는 걸 ‘송구(송기)밥’이라 불렀는데 밥이 벌겋고 소화가 잘 안 돼서 배변이 어렵다보니 배만 더 불룩해진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장리쌀’이다. 봄에 빌려 먹고 가을에 한 배 반이나 두 배로 갚는 쌀이다. 가을이 되면 아예 장리쌀 먹은 집타작마당에 부잣집 머슴들이 나락 가마니 주둥이를 벌리고 와서 깡그리 담아 간다. 이를 차곡차곡 창고에 쌓았다가 다음 해 봄에 다시 장리쌀을 놓는지라 평생 가난뱅이 농부들 눈에는 불이 인다. 지주와 반반씩 나누는 배메기를 해봐야 장리쌀로 다 빼앗기는 현실이었다.

아무리 먹을 게 가물어도 음력 유월 보름인 유두제가 되면 반짝하고 먹을 게 생겨난다. 풍농을 비는 농신제 중 하나인 유두제는 마지막 김매기인 만도리를 할 즈음 한다. 물마르지 말고 논둑 터지지 말고 병충해 없으라고 지내는 고사에 부침과 떡과 송편이 등장한다. 특히 ‘논꼬시’라 하여 논 물꼬마다 송편 하나를 젓가락만 한 나무 꼬챙이 세개에 꽂아 올렸다.

가난한 농부의 다랑논은 물꼬가 많아 송편을 다 빚을 수 없어서 감자를 삶아 짓이겨 송편을 대신하기도 했다. 진짜 송편이건 감자로 만든 ‘짝퉁’이건 아이들이 두렁마다 다니며 논꼬시 빼 먹는 게 일이었다. 논꼬시를 꽂기가 무섭게 빼 먹는 아이들을 보고어른들은 논 귀신이 먹을 시간 좀 주라고 헛고함을 치기도 했다.

빼놓을 수 없는 게 감자다. 가장 대표적인 여름 음식이다. 새하얀 서리가 내린 듯 햇살 아래서 보석처럼 부서지는 삶은 햇감자는 새참뿐 아니라 본식으로도 이용되었다. 밥할 때 아예 감자를 많이 넣고 밥을 풀 때 듬성듬성 섞어서 그릇에 담는다. 통감자가 밥그릇에 올라오면 밥풀만 핥아 다 먹고 나서 통감자는 젓가락에 꽂아 나들이 나가기도 한다.

먹을 것을 모두 직접 키워 먹었다. 사 먹는 것은 장터 국밥 정도였다. 장날 쌀이나 장작을 짊어지고 가서 농사짓지 않는 것이나 해물을 사 왔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일꾼들을 차에 태워서 읍내 식당에 가서 먹고 오든가 아니면 아예 식당밥을 농장으로 배달해서 먹는 일은 없었다. 자급도 곡류 중심이었다. 딸기나 토마토, 참외, 수박 등 과채류는 땅 여유가 있는 부잣집에서나 심었다.

 

 

남는 음식 없으니 상할 음식 없어

‘농부교실’에 온 사람들과 호박잎과 함께 연한 호박 줄기까지 썰어 넣고 끓인 수제비를 먹고 있는데 아래 밭의 할머니가 와서 풀을 매고 있었다. 수제비를 한 그릇 드렸더니 “들밥 먹어 본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특히 더운 여름날에 수제비 먹어 본 게 수십년은 되었다면서 옛날 얘기를 풀어 놓았다. 여름에 일꾼들 대접하는 음식은 보리밥이나 국수, 삶은 감자나 수제비가 전부였다는 할머니에게 오늘 먹고 좀 남을 수제비를 냉장고에 넣을 생각으로 물어봤다. 옛날에는음식을 어떻게 보관했느냐고.

“먹을 것도 없는데 남을 게 뭐가 있냐?”는게 첫마디였다. 먹을 게 없다는 말이 강조되었지만 달리 해석하면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먹을 만큼만, 먹기 모자랄 만큼만 밥상에 올라왔다는 얘기다. 이삼일치 보리쌀을 삶으면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에 담아 공기가 잘 통하는 살강 위에 보관했다. 대소쿠리도 썼지만 댕댕이덩굴 소쿠리도 썼다. 가는 빨대 굵기만한 댕댕이덩굴을 가는 싸리나무나 대나무 틀을 이용하여 교직해 짜 나가면서 소쿠리를 만들었는데 유과나 부침개처럼 기름기있는 음식을 보관했다.

이렇게 하고 며칠 지나면서 음식에 쉰내가 나면 물에 슬슬 씻어 내고 곡식을 쪄 밥을 해 먹었다. 고기와 달리 곡류 상한 것은 크게 위험하지 않았다.

수제비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밭에 있는 물외(오이)를 뚝 따서 쌈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 들깻잎을 몇 장 둘둘 말아 그렇게 먹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식은 밥 한 덩이를 큰 사발에 담아 열무 몇 개 뽑고 열두폭 치마처럼 너풀거리는 상추를 뜯어 분질러 넣고 들기름 한 숟갈과 강된장을 곁들여 비벼 먹기도 했다. 식당밥보다는 집밥이. 집에서 먹는 밥보다는 들에서 여럿이 먹는 밥이 맛있다.

 

 

 

↘ 전희식 님은 농민생활인문학 대표로, 전북 장수군 산골에 살면서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 《시골집 고쳐 살기》 등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