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밥과 똥의 순환구조

▪살림문화재단▪ 2010. 2. 10. 15:23

    

                                                            

 

 

 

* 20년전 일간지에 기고한 글이다. 똥구멍에서 나오는 똥 보다 구린내가 덜 나나. 이제 그만 단식이라도 해서 융털에 꽉틀어 박힌 끈적끈적한 숙변이라도 좀 털어내고 코끝을 똥구멍에 들이 대봐야 할텐데 용기가 안난다.

 

밥과 똥의 순환구조

                                                                                   

               

필자는 평소에 가지고 있는 꿈이 하나 있다.

꿈이라는 게 조금 허황되고 실현 불가능해도 되련만 난 꿈이 좀 소박하다.

어떻게 좀 건강해 볼 수 없을까? 식구들과 이웃들이 같이 건강하게 사는 색다른 요령이 없을까. 하는 정도의 고민이 지금의 내 꼴을 적당히 지탱하고 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비결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똥을 개운하게 잘 누는 일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똥 얘기를 시작하면 자기들은 생전 똥도 안 싸고 사는 것처럼, 점잖치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들숨과 날 숨을 반복해 생명을 유지하듯 먹는 것과 사는 것이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어 결국 이일을 멈추면 죽게 되는 것이다. 이 순환구조를 바로 알고 이치대로 살아갈 때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

 

학창시절 한쪽 눈을 실명해 인공안구를 끼워 넣은 친구가 있었는데 짖궂은 친구 녀석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야 임마 너 진짜 개눈 박았냐.

그럴 때마다 실명한 친구는 꾹 참고 태연히 답변을 했었다.?그래, 사실 마땅히 맞는게 없어 똥개 눈을 박았더니 너만 보면 혼란을 일으킨다. 네가 먹는 똥이 밥인지 네가 싼 밥이 똥인지 분간이 안돼서...라고.

 

그렇다. 우리는 싼 것을 다시 먹고, 먹은 것을 다시 싸는 것이다. 이렇듯 먹고 싸는 구조란 도대체 무엇일까. 똥과 더불어 연결된 우리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회현실 또한 다르지 않다. 가장들이 어렵게 벌어오는 생계비가 마포바지 방귀 새나가듯 가족을 통해 흘러나가고 돈 많은 불로소득자 부정한 고위 공직자들이 고급 요정에서 쏴대는 똥이 웃음 파는 여인을 통해 뜨끈뜨끈한 밥을 환원되고 있다. 그 뿐인가 잘 삮은 똥이 땅을 걸게 하고 땅은 우리에게 생명을 담보하고 있음을 다시 설명할 이유가 없다.

어떤 종교에서든 음식을 앞에 두고 경건하게 감사하는 것이 상례이다.

 

필자가 속해있는 기독교에서도 음식을 대하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를 한다.

진심이 아닌 형식적인 기도라 하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특히 불가에서 수행자들이 식사하는 것을 <공양>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식사라기보다 중요한 수행의 일부분이라 할 만큼 엄격하다.

그런데 대부분 똥 눌 때는 감사하거나 기도하는 일을 생략해 버린다.

변소 갈 때 맘 다르고 올 때 맘 다르다더니, 먹을 때 맘과 눌 때 맘이 달라서일까.

그래 음식과는 달리 똥은 구린내가 나서 일까.

당연히 똥에서는 구린내가 나야 한다.

방귀를 뀌었는데 소리만 요란하고 냄새가 없는 사람은 싱거운 사람이다.

똥과 된장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모양새 보다 냄새가 아닌가?

향신료의 생명이 향기에 있고, 소금의 생명이 짠 맛에 있듯이 구린내가 나야 똥이고, 똥의 생명력은 구린내에 있는 것이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 입체 영화를 방영하면서 화면에 라일락꽃이 만발하고 벌 나비가 노닐 때는 효과음향과 함께 라일락 향을 분사하고, 장미꽃이 보일 때는 장미향을 분사하는 등 입체영화의 효과를 극대화 시켰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에 관람객들이 모두 항의하는 통에 입장료를 모두 환불해 주었다. 이유인즉 극장 안에 온통 똥 구린내가 나서 더 이상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필자가 꾸며낸 말이지만, 사실 50원 내고 공중변소 다녀와서 구린내 난다고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다.

인위적인 냄새가 아니라면 구린내에 대해서도 너그러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이나 잘 먹어야 건강할 것 같지만 사실은 잘 싸야 건강하다.

한 예로 집에서 키우는 닭이나 개도 깔끔하게 싸고 똥구멍 언저리의 털이 보송보송해야 건강한 상태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아침부터 화장지를 두루마리 째 들고 한 시간씩 앉아있는 사람보다 밀어내기 한판으로 승부를 가리고 허리띠를 질끈 매고 나오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자랑 같지만 필자는 식탁에서 드리는 기도 못지않게 변소에 앉아 드리는 기도가 훨씬 정직한 편이다.

먹는 것이 기쁨이라면 배설은 늘 행복이었다.

단식을 해 본 독자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투쟁을 위한 단식이 아닌 건강을 위한 단식이라면 만병의 원인이 숙변에 있음은 잘 알려진 것이고, 오랫동안 대장에 쌓인 숙변을 배변하는 것이 단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독자들 중에는 필자가 왜 초장부터 지면에 똥칠을 하는 것일까 궁금하겠지만 일단 입에 들어간 밥이 장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소용된 밥은 소화를 시켜 똥이 되어 배설되어야지 머물러 뭉그적거리다 보면 그게 곧 숙변이고 결국은 몸이 병들게 되는 것이니 건강에 관한 상식으로 여기에 견줄만한 또 다른 억지는 안 쓸 일이다.

 

돌고 돈다는 돈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시궁냄새가 풀풀 나는 교육계도, 정치판도, 심지어는 종교계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어느 하나라도 막히면 모두가 흐름이 정체된 속에 시궁냄새 나는 숙변이 되고 말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줄기를 파악하고 밥과 똥을 오가며 분주히 뚫기에 바쁜 사람이 요구된다.

끝으로 나 또한 융털에 끈적끈적 박혀있는 숙변은 아닌지 한번쯤 점검해 볼 일이다.

 

 

李竟濟(友松) 사제,칼럼니스트

(무등일보 1993.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