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13.진정한아름다움

▪살림문화재단▪ 2013. 4. 20. 19:00

진정한아름다움

 

 

며칠 전 TV 개그프로그램에서 개그우먼 이영자와 가수 강수지가 함께 출연했다. 사회자 는 남자 인기가수를 불러내 ”이영자씨와 결혼하라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져 객석의 소녀들로 하여금 탄생과 박수를 끌어냈다. 그렇다. 개그우먼 이영자, 그는 거울속에 나타난 백설공주 신드롬에 빠진 시청자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했고, 꽃사슴 같은 강수지의 형광등 빛 얼굴은 펜들의 대리만족과 같은 갈채를 받기에 충분했다.

미인이 되기를 싫어하는 여성이야 없겠지만 도대체 미인의 개념은 무엇일까. 머리끝부터 시작해서 쌍꺼풀수술, 눈두덩. 똥배. 허벅지의 기름기 제거작업과 미용체조에 이르기까지 방 식도 다양하고 쏟는 시간과 정열 또한 괄목할만하다.

또한 젊은 엄마들은 귀찮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속사정은 가슴이 미워지는 것이 싫어서 자 녀에게 소젖을 먹여 키우는것이 보편화되고 말았다. 그래 본래 목적을 외면한 또 다른 쓰임새가 있겠지.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엄마가 오이로 얼굴을 덧씌운체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를 맞는다. 평생대학에 다니는 중년의 어머니가 얼굴에 계란을 바르고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맞는다.

자. 20-30년 전의 어머니들을 생각해 보자. 그분들은 못 배워 무식해 보이고 투박했다.

오이가 있으면 가족들 오이냉채 해 먹일 궁리를 했고 어쩌다 계란이라도 하나 생기면 남편 의 도시락 반찬을 궁리했다. 감히 그것을 얼굴에 쳐바를 엄두를 못냈다. 하늘이 무서워서였다.

그런데 오늘날 아름다움의 기준은 서구적 가치관에 의해 정형화되고 말았다. 그것은 비너스와 클레오파트라, 짧게는 가슴이 넉넉한 마릴린먼로 같은 미녀의 고전을 통해서 아름다움도 국제화시대에 접어든 셈이다.

각종 미인대회에서는 여성들을 벗겨 세워 놓고 미소를 짓게 한다. 그리고 기준을 가슴, 허리, 궁둥이의 크기를 재서 평가한다. 거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은 몸이 가날프고 눈요기 하기에 좋은 ‘남성을 위한’ 여성인 것이다.

부정으로 얼룩진 미스코리아 선발과정 따위야 논외로 치자. 브라운관에 비춰진 미언대회를 초연한 체 지켜보는 남편의 눈빛과는 다르게 미인의 가중치에 턱없이 못미쳐 딴전 피우는 아내의 속마음을 왜 모를까.

이렇게 선발된 미인은 고가의 상품가치를 갖게 되며 수많은 상품광고의 모델이 된다.

비근하게는 볼펜 한 자루를 선전하더라도 여자의 빨간 입술위에 올려놓아 구매의욕을 높이 고 자동차, 오토바이 위에도 어김없이 벌거벗은 여인이 반쯤 드러누워 환상속에서도 속도감 을 느끼게 한다.

소주집, 맥주집, 양주집에 이르기까지 반나의 요염한 포즈를 취한 여자가 페널에 짝 달라붙어 술을 권한다. 심지어는 입구의 네온 간판에서부터 양주잔에 담긴 나체의 미인이 양주와 함께 흘러내리는 곳도 있다.

요즘 일본에서는 동양적언 미를 위혜 짱꺼풀 제거수술이 유행이라는데 동양적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무젖가락 같은 긴 몸매는 속없이 연약해 보이며 가슴과 궁둥이의 풍만함은 오히려 미련해 보인다.

본래 그렇게 생긴 것을 나무랄 이유야 없겠지만 만들어 낸 미련함에 갈채를 보낼 이유 또 한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다. 지식도 아니다. 알량한 교양도 아니려니와 가문도 학벌도 아니다. 이런 가치관이야말로 서양귀신에 사로잡힌 팔등신이며, 우리의 삶에 있어서 본질을 도외시한 착각이다.

서구화된 기준으로 자기의 얼굴과 몸때를 거울에 비춰보고 있는 한 우리의 주체적 정신문화는 기대할 수 없다.

못나도 좋고 부족해도 좋다. 본래의 우리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멋’이 아쉽다. 자기 일에 진지한 장인들의 표정과 80평생의 여정이 투영된 굵게 패인 촌로의 주름살을 여느 여인의 깍아 세운 콧잔등과 비교할 수 있을까. 美는 곧 ’멋’일진대.

[무등일보 1993.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