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15.죽음의 질을 떨어뜨리는 뇌사

▪살림문화재단▪ 2013. 4. 20. 19:02

죽음의 질을 떨어뜨리는 뇌사

 

인류가 시작되면서 부터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신비와 공포에 쌓인체 인간이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라고 죽음을 정의하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법 이론적인 논의도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면서 주관적인 이해만 있을 뿐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반대개념인 삶의 현상은 호홉과 순환 즉 심장의 박동 및 정신기능의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기능으로 말하면 폐와 심장, 뇌의 3대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능들이 정지되면 임종을 선언하게 되는데 고래로부터 숨을 거두셨다고 말해왔습니다. 이 말을 신앙으로 표현하면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어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 2:7)는 인간창조 이야기에서 말해주듯이 삶의 시작을 위해 주었던 숨을 거두어감으로서 현세의 삶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동양적인 표현으로 돌아가셨다는 임종의 표현 또한 무한에서 와서 유한을 살다 무한의

세계로 되돌아감을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의학계는 의학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생겨난 뇌사라는 용어와 개념 을 만들어서 뇌사=곧 죽음이라는 도식적인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뇌사란 뇌의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어 도저히 회복하지 못할 상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가역성, 어떤 원인이 될 만한 것을 제거해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상태라는 것인데 이런 의학적 개념인 뇌사를 죽음으로 합법화하려고 입법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의학계는 뇌사인정이 합법화 되어야 만이 장기이식도 정당하게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 더 많은 생명에게 소생의 희망을 줄 수 있으며, 의학의 발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필자는 종교인으로서, 그리고 사제로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뇌사의 공인이 죽음의 시간을 판단하는 문제라면 모르되 장기이식을 위한 뇌사의 합법화라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단순한 부품의 결합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자동차의 그것들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의학계에서 주장하는 불가역성이라는 개념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가 않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그리고 인간의 삶이 무엇이냐고 하는 근본적인 물음도 없이 태아의 성을 감별해서 죄의식도 없이 낙태를 일삼아 오던 현대의학의 도덕성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죽음의 생물학적 원인이 무엇이냐는 토론이 아직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단지 사망의 사기를 판단하는 방편에 불과한 뇌사를 죽음이라고 정의하는 의학계에 뭐라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인간은 영적이고 이성적인 동물로서 죽음은 인생의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현세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종말이면서 구원과 생명에의 세계로 진입하는 가장 숭고한 행위입니다. 어쩌면 신앙을 떠나서 보아도 죽음은 두려움이면서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의학계는 무엇 때문에 뇌사의 합법화를 추진하려고 하는가. 더 많은 생명에게 소생의 길을 열어주고 의학의 발전이 있다는 말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의도는 없는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뇌사가 공인될 경우 어떤 계층에서 장기이식 수술을 받게 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뇌사의 합법화를 부추기고 있는지, 이들의 이해관계를 꼼꼼히 따져보면 그들의 속생각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자가 범시민운동으로 추진되고 있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펼쳐지는 시민운동이야말로 부추기고 권장해야할 운동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거론되고 있는 뇌사인정의 문채와는 경우가 다르므로 달리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뇌사는 지난 80년대 초반부터 찬성을 주장하는 의료계 쪽과 반대를 주장하는 종교, 법조계 등 시민단체의 의견이 1명 I명이 맞서 아직까지 사회적 합의조차 얻지 못한 체 지금까지 사망 판정의 통념이 되어있는 심폐사처럼 죽음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88년에 국내에서 뇌사자 장기이식수술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뒤로 의료계는 심심찮게 뇌사자의 장기이식수술이 행해지는 등 불법의료 행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보사부는 지난해 말에 개정된 의료법의 시행령개정안을 만들면서 입법형태는 아니지만 그 전단계의 성격이라 할 수 있는 의료법시행령에 반영하는 변칙을 동원한 것 입니다.

현대 의학의 발달이 장기이식을 통해 죽어가는 생명을 어느 정도 연장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 논리가 결코 행복과 연결될 수도 없거니와 제한된 삶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 이상의 별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나자로를 살리셨고, 고질적인 질병을 가진 병자도 치유해 주셨지만 그들의 삶은 한시적이었을 뿐 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관심은 가치관의 변화를 통한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선진국으로 분류된 외국에서는 장기이식의 수요에 공급이 미치지를 못해서 가난한 3세계로부터 장기를 매매해서 국제적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고 생명과 생체의 상 업도구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건강과 정력을 위해서라면 보호동물의 성기도 잘라먹고 산짐승의 피도 빨아먹는 판에 뇌사가 인정된다면 일부 부유층의 장수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신장 한쪽 쯤 거래되지 않으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당국의 통제권역을 벗어난 무인가 시절의 수용환자들이나 인신매매를 통한 장기 거래 또한 없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더욱 이 최근에 있어 왔던 비윤리적인 의료계의 불신이 팽배해 있는 터에 뇌사가 공인될 경우 뇌사의 판정이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인지 또 이를 악용하지는 않을 것인지는 심히 우려가 됩니다.

의학 발전이 마치 유한한 생명을 언제까지라도 연장시켜줄 것 같고 자궁이 아닌 시험관에서 우수한 두뇌를 가진 유전인자들을 결합해서 훌륭한 아이를 복재해낼 수 있을 것 같아도 이것이 결국 인간의 윤리를 망각하고 신의 자리를 넘보는 어리석음이며 인술이 아닌 저질의료상업주의로 전락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사실 검증 가능한 과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수천 수 만년에 걸쳐서 인류의 발전과 함께 경험에 의해 감각되어진 것이고 종교계의 주장 또한 이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업장에서 보면 의학도 의료인도 역시 하느님의 도구일 뿐 병자를 치료하시는 주체는 하느님뿐입니다. 또한 의료 행위는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원형과 인간성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의료행위일 때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뇌사의 합법화 문제는 아직 국민들에게 인식되지도 않았을 뿔만 아니라 선진국이라 불리우는 서구의학의 모순은 간과하고, 장기이식을 위한 합법적 수단을 목적으로 뇌사가 인정된다면 우리는 또 다시 하느님과 인류의 역사 앞에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신문 1994.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