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16.죽음과 죽임

▪살림문화재단▪ 2013. 4. 20. 19:03

 

죽음과 죽임

이우송 성공회사제 글

 

사제라는 직업이 그렇듯 죽음이 뭐냐.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느냐는 종교적인 질문을 가끔씩 받는다. 그러나 한 번도 만족한 답변은커녕 막연하게 ‘생각해 보자’ 혹은 공자의 생각을 빌어 ‘삶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죽은 다음을 어찌 알겠느냐.’는 것이 고작일 뿐, 천당이다 지옥이다 하는 교리적인 설명을 못해 본 터이다.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형이자 학우였던 그리고 나의 요가수련에 있어서 선생님인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추석 다음날 찾아온 그는 아버지의 묘소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누님의 묘소를 둘러보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고 죽은 누님과 매형의 양자로 들어온 조카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한때 함께 사제수업을 할 때 기숙사에서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촉촉한 밤을 지새우다 새벽미사를 거른 기억도 있다.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정리하면 이렇다.

그는 전남고흥에서 태어났고 여순반란사건 때 아버지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을 당시 생후 18개월의 피붙이로 고달픈 운명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젊디젊은 어머니는 수절을 하며 나머지 생을 오누이에게 바치는 동안 가세는 기울고 누님마저 결핵이라는 몹쓸 병에 걸려서 견디다 못해 19세의 꽃 같은 나이에 저수지에 투신하여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것이다. 누님이 남기고 간 선물이라면 약값, 병원비 등 빚더미와 동생 공부 잘 시키라는 유서가 꽂힌 ‘알기쉬운 삼위일체’ 한 권이 다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자식이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다. ‘공부하면 네 애비처럼 된다. 네 애비 6형제 중 3형제가 좌익하다 죽었는데 똑똑한 순서대로 죽었다. 사람이 살고 봐야지 공부 따위가 대수냐. 공부 따위 그만두고 나하고 같이 땅이나 파먹고 살자’고 해서 땅이나 파먹다 스물한살이 되어서야 상업학고에 다닐 수 있었다는 이야기.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영하다는 무당 두 명과 민등부락 무당 두 명이 와서 씻김굿을 하고 저수지에서 누님의 영혼을 건져내는데 놋쇠밥그릇에 쌀을 담아서 무명배로 칭칭 묶어 낚시하듯 몇 번을 되풀이 한 끝에 건져낸 영혼을 군대에 가서 죽었다는 원귀와 사후 결혼식(영혼결혼식)을 시키고 양자까지 입적하면서 없는 가산을 탕진할 때는 ‘저 염병하라고 누님이 죽었냐.’며 이를 악물었다는 이야기

그 당시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 턱이 없지만 하늘을 향해 ‘하느님 이게 무손 해괴한 장난입니까.’를 되뇌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기독교에 귀의하게 됐다는 것이 밤새 나누었던 이야기의 본말이었다.

인도에 가서 명상과 요가를 공부하고 와서 자기 일에 충실한 그는 지금도 사제가 못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이미 속사정을 알고 있는 터라 ‘그럼 한번 가봅시다’ 해서 찾아간 곳이 송정리 부근의 평동 저수지였고 달빛에 길을 물어 찾아간 사돈댁은 이미 15년 전에 이사 가고 없었다. 동네 사람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끝에 외딴 곳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돼지 400수를 키우며 사는 조카를 만나 소주 한 병을 손에 쥐고 누님을 찾았다.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도 한동안 서서 기도를 드렸다. 엿듣기는 어려워도 눈가에 비친 설움을 홈쳐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달빛에 조카와 외삼촌이 마주 앉아 풀기 없이 나누는 대화는 꽤 오래갔다. 단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양아버지와 양어머니를 불러 볼 수도 없으려니와 외삼촌이라고 무슨 면목으로 조카를 대할 수 있으랴. 그냥 그냥 서로의 근황을 묻고 서른다섯이 되도록 시골서 혼자 사는 조카 윤성이를 금년 안에는 짝을 지워 보겠노라고 말 맺음을 하고 돌아섰다.

차에 올라서도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는 듯이 ‘내 손으로 누님의 뼈를 발라 저 속에 묻었지만 누님은 어머니 가슴 속에 묻혀 있고, 내 맘 속에 묻혀 있지’라고 되뇌인다.

 

필자가 때 아닌 죽음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가끔 받아 보는 종교적인 질문 때문이 아니라 시골 성당에서 사목을 하면서 잦은 죽음을 목격했고,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제사장으로서 죽은자의 영혼과 함께 살아 있는 자를 위로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종교와 철학을 고안해 내도록 교사한 것은 무엇보다도 죽음이었다. 특히 종교는 죽음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넘어서거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함으로써 실존적인 불안과 고통에 빠진 인간들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얻어 왔다. 우리 민족에게 죽음의 문제와 제사의 문제가 우리 생활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거니와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한 가지 이상의 종교적 양식을 택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근간을 차지하는 유교문화는 주검을 강조한 사체 의식이 발달했을 뿐 아 니라, 죽은자에 대한 제사의식도 탁월하다 할 것이다. 반면에 불교는 도대체 죽음이 무엇이냐. 하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유교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주검’을 태워버리는데서 요약이 된다. 실질적인 그들의 관심은 윤회의 업으로부터 벗어나 해탈과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삶의 실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의 적극적인 관심은 죽임당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반증하고 있다. "너희들이 죄 없는 우리의 선생님(예수)을 여기(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억울한 죽임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생님은 살아났다”하는 주장을 되풀이 하는 것이 미사, 즉 예배 이다.

무속에서 최영 장군을 모시는 큰 무당이 많듯 전봉준이 그렇고, 광주의 5월 영령들이 그렇다. 살아있는 자들이 치루는 가장 큰 장례와 제사는 억울한 죽임일 것이다.

 

지난 추석날 많고 많은 조상의 묘를 건어 뛰어 아버지나 누님의 묘소롤 찾아 서울에서 내달려온 필자의 형이자 친구인 송시몬. 그는 70년대 한때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의 대표로서 유신이라는 미증유의 정신적 착란기를 맞게 되었고, 군사독제에 항거하다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 기억을 지울 수 없는 사람이다.

이후로도 그는 요가와 명상. 단식과 대안의료의 전문가로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매달려 살아온 이시대의 의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경우는 다르지만 아버지와 누님의 비정상적인 죽음을 그토록 괴로워하는 까닭은 쓰라린 역사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죽임당한 것이라는 인식과 오늘 자기의 신앙으로 재해석 하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존경하고 아끼는 동지이자 학우였던 형의 프라이버시를 상하게 했다면 용서를 빈다.

[무등일보19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