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29.위대한 대물림

▪살림문화재단▪ 2013. 4. 20. 19:15

 

위대한 대물림

 

 

묵은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마음의 자세를 송구영신이라고 한다는데 묵은해가 어디 있고 새 해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이 숫자를 붙여놓고 옛것과 새것을 구분할 뿐 똑같은 해가 쉬지 않고 서로 돌아갈 뿐이다. 그러나 붙여진 날짜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갑술년을 맞아 기억의 서랍속에 차곡차곡 챙겨 놓았던 과거를 꺼내 옛 어른들의 지혜를 되새겨볼까 한다.

어렸을 때 木浦의 유달산 기슭 북교국민학교앞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영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만 두었고 본업인 한약방도 그만 두시고 생활이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지만 위로 딸 하나에 아래로 아들이 여섯이나 되어 입하나라도 줄일량으로 여섯 살 바기 나를 장흥에 있는 외갓집으로 보냈다

내가 기억하는 인생은 여기서부터만 기억한다. 말라비틀어진 여섯 살 바기가 와갓집에 도착했을 때는 동갑내기 외사촌 누나가 이미 터주로 자리하고 있었다. 50점 을 따고 들어간 진숙이 앞에서 외할아버지며 외숙모가 아무려 나를 부추겨도 나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울보였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진숙이를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려댔고 그만해서 울 녀석이었다면 할아버지는 시작도 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끈질긴 놀림에 풀이 꺽여 울음을 터트린 진숙이를 보고서야 해벌쭉하니 엽이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또 일곱 살 때는 증조모님과 조모님이 사사는 해남에 살다가 몇 년 만에 목포에 왔을 때는 그간 떨어져 살았던 형제들 안에서 새로운 이방인으로 적응해야 했고 급기야는 동생에게 맞고 울기까지 하는 속칭 얼빵한 녀석이 되어 있었다. 집안에는 한약방 하시는 할아버지가 계셨고 엄마아빠가 계셨지만 얼간이가 다 되어 징징거리는 자식과 손주녀석의 우방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고아원처럼 바글거리는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손주녀석 하나 부추겨서 해결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니었다. 역시나 할아버지는 특유의 상투적인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송이 저 녀석은 본래 너희형제가 아니고 뒷개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우는 아이를 오히려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다.

놀림 말에 가까운 우스갯소리였지만 당하 는 나는 당황하기 일쑤였고 아니라고 억지도 써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일소에 부치고 지금, 네 엄마는 동생 누구의 엄마란다. 옆에 계신 아버지도 웃기만 하신다.

 

일찍이 당해본 형들도 주제넘게 할아버지 장난말에 맞장구까지 쳐준다. 그러면 우리엄마는 누구냐고 묻는다. 그때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 둔 이야기를 시작한다. 네 엄마 는 저 뒷개다리 밑에서 생선장수를 하는데 가끔 집 앞으로 다닌다는 것이고 네가 불쌍해서 데려다 키우는 것이라고 을려댄다. 이쯤 되면 더 못버티고 울면서 그간 집앞을 다니던 딱돔장수며 병치장수 아주머니를 떠올려보다 부엌으로 달려가서 엄마에게 물어본다. 진짜 우리엄마 아니냐고, 역사 엄마는 표정만으로도 엄마다.

목을 꼭 안아 눈물을 닦아 주시며 네가 징징 우니까 울지 말고 강해지라고 할아버지가 괜히 놀려 주려고 한 말이라면서 짠 무쪽 하나를 행궈서 쥐어주며 나가 놀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야어지고 객관적인 자기성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족의 성원으로 자리잡아간다. 학문적인 교육이론 따위를 배우지 않은 할아버지였지만 눌려 있는 아이를 북돋워주고 거칠게 구는 아이를 가다듬어 균형을 유지시켜 주었다. 형제들 틈바구니애서 연약하게 자라는 아이를 달구어 강하게 하셨다. 손자들을 평등하고 가지런히 길러내는 지혜를 생활속애서 실천했던 것이다.

 

며칠 전에 목포 집에 내려가 한약방 하시는 아버님의 방에 들어서니 조카녀석들 세녀석이 할아버지 약방을 뛰어다니며 동생들을 쥐어박아 울리기 일쑤였다  이제 칠순의 아버지는 역시나 ‘저 놈은 남의집 자식이 와서 집안을 시끄럽게 하네! ’ 로 말붙임을 시작하신다. 이제 조금 있으면 부잡스럽게 뛰어다니며 동생들을 괴롭히던 녀석이 뒷개 다리밑의 고아가 되어 울어 나자빠질 것이 뻔하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실컷 당해 본 기억이 되살아나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의 표정을 보면서 조카녀석들은 서서히 기가죽기 시작했다. 위대한 대물림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나는 창피해서 못 물었지만 맹랑한 동생녀석이 아이는 어디로 낳느냐. 진짜 배로 낳느냐. 자기생각엔 똥구멍으로 낳는거 같은데 맞느냐. 는 등 궁금증이 한참 많을 때 그저 다리 밑으로 낳는다고, 오늘날의 성교육에는 못 미치지만 일찍이 암시를 준 셈이다.

다리밑에서 주워왔다는 암시를 통해서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는데 대답은 수월하면서 배꼽이 아닌 다리 밑이 바로 출생의 통로라는 것을 깨우친 아이들이 성장해 가면서 어른들의 지혜에 감탄을 하고 자신들도 어른이 되었을 때는 대물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아이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몸과 마음이 균형있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조금씩이 아니라 큰 폭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풍속도가 바뀌었다고나 할까 부모가 침실에 들어갔을 때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 멈칫하며 ‘응, 난 다 알아 문닫아 줄께’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중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처용’에 뒤얽힌 다리를 이해하는 것에 비하면 경우가 너무 다른게 아닐까.

할아버지약방에서 몰래 훔쳐 먹던 감초나 계피가 요즘 아이들의 햄버거나 피자에 견줄 수 없다. 더구나 아이들 몰래 어른만 보는 영화「무릎과 무릎사이, 뼈와 살이 타는 밤」 도 아이들이 어른 몰래 홈쳐보는 재미와 호기심에는 못 미칠 것이다.

새해를 맞아 어린 사절 할아버지의 균형 잡힌 놀림이 새삼 그리운 것은 해가 갈수록 오고지신의 지혜가 요청되는 때문이리라.

[무등일보 1994.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