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88.광주교대‘SINCE 1924’가 맞다.

▪살림문화재단▪ 2013. 4. 20. 20:15

 

광주교대‘SINCE 1924’가 맞다.

 

광주교대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숭모관)을 제안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를 살펴보면 1920년대말기부터 30년대에까지 끓임 없이 광주사범학교학생들의 기록들이 나오는데 정작 광주사범학교는 1938년 개교라고 기록되어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광주교대 연혁을 살펴보고 다시금 전주교대를 비교해 보니 1923년개교 80주년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제하에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와 함께 치열한 학생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광주사범학생들은 누굴까 하는 의구심을 풀기위해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사를 거슬러가서 보니 1924년에 광주에 개교한 전남도립(공립)사범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뒤를 이어 1938년에 다시 개교한 광주사범학교 출신의 학생독립운동가들중 생존해 계신 분들을 만나 뵙고 늦게나마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사연들을 듣게 되었다.

살아계신 광주사범학교의 학생독립운동사의 산 증인들 이다.

역사는 늘 그래왔듯이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우리역사를 쓴 사람들에 의해서 더 많이 누락되고 없어지고 왜곡되어왔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역사를 과학이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철학이고 교훈이 아닐까 생각 한다

일본제국주의치하에서 3대 민족운동이었던 3.1운동, 6.10만세운동에 이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학생층에 의해 주도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육적인 견지에서 의의가 깊다.

특별히 광주학생운동의 발발과정에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흔적과 기록, 기념비, 역사적 기술과정을 살펴 볼 때 대체적으로 잘 기록되고 잘 보존되어왔다.

그러나 일제식민지통치의 모순을 인식하고 극복하기위해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인 학생운동사가 광주지역에서는 지나치게 광주고보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함께 참여한 사범학교입장에서 볼 때 상당부분 가리어진 결과를 보면서 후손된 우리들로서 아쉬움이 남는다.

3.1운동이후 일제의 거센 탄압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은 불길은 전국적으로 194개교(전문학교4개교 중등학교136개교 보통학교54개교)등 참가학생수가 5만4000명에 달하고, 광주지역에서만도 170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받았던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3.1운동이후 가장 큰 규모로 전개되어온 운동이다.

또한 533명의 학생이 학교로부터 자진퇴학을 하였고 233명이 무기정학 298명이 강제전학하고 172명이 해외유학을 떠났다.

여기서 광주사범학교는 일제에 의해 1931년 3월 폐교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1929년 6월부터는 광주고보졸업생(19명)은 무등산에서, 장재성과 더불어 광주농업학교(18명)은 무등산에서, 광주사범학교(14명)는 형무소뒷산에서, 학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독서회로 조직을 개편하고 확대를 강화하는 등 ‘독서회중앙본부’를 결성하여 서울의 신간회와 연락을 취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9월에는 광주고보, 광주사범,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모여 광주학생소비조합을 결성해서 무등독서회와 함께 독립정신고취 및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10월 30일 나주역 충돌사건을 시발로 한일학생간의 쟁투가벌어지다가 11월 3일(명치절)에는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고보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일본인 신문사를 습격하는 등 대대적인시위가 국내외로 파급되어 학생독립운동은 1930년대라는 시대적인 상황과 더불어 다양한 정치운동세력과 관련되기 시작한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1922년, 신 교육령을 반포하고 식민지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는데 1924년에 광주에 전남도립사범학교를 설립한다.

30년대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치열해지면서 특성상 사범학교가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해서 광주공립사범학교를 폐교한지 7년 만인, 1938년 다시 광주사범학교를 다시 개교한다.

그러나 일제의 상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사범학교학생들은 광주공립사범학교선배들의 뒤를 이어 6.1항일동맹휴학을 비릇해 일제가 발악을 하던 43년엔 노동훈, 조규학, 왕대호등 심상과 4회를 주축으로 비밀결사대인 무등독서회를 조직해 학생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이념적으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면면히 흐르는 그 정신은 4.19학생운동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45년 해방이 된 이후 에는 학생독립운동을 하던 동지들 가운데는 이데올르기의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변호사로 있던 이덕우는 도립(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1독립운동으로 2년여의 옥살이를 했으며 공산당원 이었던 그는 6.25때 이승만의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되었다.

당시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많았던 사범학교출신들의 항일독립운동의 사료가 빈곤한 아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지난해에는 남한에서도 ‘박헌영’이 독립운동가로 추서되는 이 시점에서 일제에 의해 광주사범학교의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는 일과 광주도립(공립)사범학교와 함께 광주사범학교의 학생독립운동정신을 광주교육대학교가 계승해야할 것이다.

“日本의 강제 합방에 의한 악독한 침략정책으로부터 해방된 지 반세기가 넘은 60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 모교인 광주교육대학교에 학생독립운동 숭모하는 기념탑 하나 못 세우고 60년 세월을 넘겼습니다.

항시 말을 하면서도 뜻을 모으지 못하여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해방이 환갑을 맞이하는 해 온 민족의 애족심을 불러 일으키고 더욱이 국민교육의 바탕이 되는 교육대학교에 애족교육의 얼이 되는 학생독립운동기념관(탑)을 건립하지 못함은 교육학의 큰 부끄러움이라 생각하면서 하루 빨리 건립하여 애국애족 교육의 얼을 불 일으키려는 취지에서 뜻을 같이 할 것을 호소합니다. “

2005년 8월 15일 [노동훈 옹. 광주사범학교졸업, 생존해 계신 독립유공자]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사업은 광주교육대학교에 광주교대학생독립운동기념탑(숭모관)의 건립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고보)의 광주학생운동기념탑, 광주농업고등학교(광주농업학교)의 학생운동기념비, 전남여자고등학교(광주여고보)의 광주학생운동비, 수피아여자고등학교(수피아여학교)의 3.1학생기념탑 등 학생독립운동의 기념물을 제작 설치해서 후배와 후세들에게 자랑스러웠던 선배들의 업적을 기리면서 후배와 후세들이 어둡고 부끄러웠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정작 교사를 양성하고 사도를 일으켜 세워야할 책임을 지닌 교육대학교에서는 그토록 자랑스럽고, 우러러 보아야할 선배, 선열들의 학생독립운동사를 몆 줄의 역사적인 기록에만 의존하고 가시적인 기념물하나 설치하지 못한 체 민족교육에 소흘히 했던 점을 늦게나마 통감하고 부끄러웠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진작 서둘렀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광주사범학교출신의 많은 독립유공자와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셨던 분들이 한분, 두 분 고인이 되셨지만 아직 살아남은 옛 동지들과 더불어 후손들이 뜻을 모우고자 한다.

사범학교의 특성을 살려서 타 학교의 탑, 비, 등과는 모습을 달리하는, 조형성이 돋보이는 ‘광주교대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을 건립해서 교육대학생들과 후손들의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애국 애족하는데 귀감이 되도록 힘쓰고자 한다.

이는 1924년에 설립된 사범학교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일이며 광주에 설립된 전남도립(공립)사범학교의 학생독립운동정신을 광주사범학교와 함께 광주교육대학교가 계승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호남에서 같이 출발한 전주교대의 연혁을 보자. 1923년 5월 전라북도 공립사범학교 개교로부터 모체를 삼아 1936년 전주사범학교 개교 전주교육대학 개교 등 전주교대 개교80주년사를 쓰고 있다. 서구의 대학들이 수도원의 수업기간을 개교의 SINCE로 삼아 몆백년의 역사를 기록하거나, 1398년(조선 태조7년)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 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을 개교로 보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쓴 것에 비하면 합리적인사료가 있을 뿐더러 사실에 기초한 광주교대는 SINCE 1924'가 맞다.

1938년에 개교이후에 졸업한 동문들 가운데 공립(도립)사범학교를 계승을 반대하고 광주사범학교의 계승만을 주장하시는 광주교대동문이 계시다면 묻고 싶다. 엄격히 말해서 초등교사양성기관인 사범학교는 중등학교과정이고 지금의 교육대학은 고등교육과정이므로 고등학교를 대학이 계승하는 경우는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문제 를 거론하는 이도 없고 당연히 교대는 사범을 계승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덧붙여

공립사범학교가 폐교된지 7년후에 광주사범을 설립했으므로 전주나 여타의 사범학교와 다르게 계승할 수 없다면 사관에 있어서 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남공립사범학교만이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등과함께 치열한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재적학생 수 대비 극렬함을 좌시할 수 없었던 일제당국은 불가피하게 폐교를 시키는데 당시의 불운함은 오늘에 자랑스런 훈장이 아닐까. 이런 논리로 공립사범을 계승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가 허약하다.

SINCE 1924' 일부 논란이 있다면 논의를 다시 하라. 한 발만 물러서 보면 너무나 자랑스런 선배들이었고 안고가야 할 아픔의 역사가 있다.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누락된 역사 왜곡된 역사를 더듬어 언제든 다시 쓸 수 있는 용기와 너그러운 포용력이 요구된다.

* 2006.5.15.일자 광주교대신문에 기고한 글을 일부 보완했음. 참고로 필자는 광주교대나 사범학교와는 직접관련이 없지만 광주교대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우송/조각가, 한국미술협회 남북미술교류위원장 [광주교대신문 2006.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