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태학(divine saminary)/오미아 단상

저 남편

▪살림문화재단▪ 2019. 11. 12. 02:28


[살림단상]





저 남편


 

오미아

 

 

 

남자들 중에 한가지 일 밖에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내 남편도 그중에 한 사람이다.


 


한꺼번에 이일 저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편에게는 꼭 집어서 한가지 한가지씩 순차적으로 부탁해야 겨우 도움을 얻을수 있다.


 


예를들면 남편에게 부탁할때 '집에서 나오기 전에 음식물 쓰레기 밖에 내놓고, 가스 잠그고, 보일러 외출로 돌리고, 밥솥에 쌀씻어 놓았으니까 작동 버튼 누루고 나와요' 라고 하면, 그걸 어떻게 다 하느냐고 화를 낸다.


난 매일 하는 일인데......


 


그때는 시차를 두고 한가지씩 부탁을 해야 한다


 


음식물,가스, 보일러, 밥솥 등등....


하나를 마치면 다른 일을 또하나를 마치면 다른 일을 부탁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귀찮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말안하고 내가 하거나 포기 할 때가 많다.


 


중요한 일이나 행사 날짜가 잡히면 그 전에는 어떤일도 할 수가 없다.


오직 그 일만 생각하고, 그 일 밖에는 안한다.


그래서 남편이 일을 맡으면 그 일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마무리가 되고, 좋은 결과일 때가 많다.


 


내 일이 남편의 일과 겹치거나, 중요 행사 일정 전에 남편과 공동 작업을 해야할 일이 생기면 난감해 진다.


 


단순한 남편은 복잡한 나와의 일을 할 수 없고, 일단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는 모른다.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그 상황을 익히 알기에 미리 포기하고 플랜B 플랜C,D...를 준비한다.


 


이번주에 중요한 행사날이 잡혀 있는 남편은 한달 전부터 계획된 가족 여행을 기억하지 못한다.


 


시월의 마지막 날은 우리의 결혼 기념일이다.


그래서 겸사겸사 시월 마지막 주에는 가족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물론 남편은 모른다.


 


지금까지 남편은 한번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때가 중요 행사가 많고 바쁜때이기 때문이다.


 


이 때는 항상 단풍이 들고, 국화가 피는때다.


그래서 여기 저기 축제로 북적이고, 사람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남편뿐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도 일 약속이 아니면 잡기가 수월하지 않다.


그래서 항상 이맘때 여행은 딸아이와 나 단 둘이 떠날때가 많다.


 


지난주 지지난주 너무 바빠서 딸아이와 가을 여행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못했다.


 


딸아이는 기억력이 좋다.


특히 엄마가 무언가를 사주겠다거나, 해주겠다고 한 말은 절대로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또는 예의상 하는 말이라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


 


나는 바빠서 잘 기억하지 못 하겠는데, 내가 지 지난주 딸아이에게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가을을 만나러 가자'고 한것을 기억해 내고는 휴일 아침부터 나를 다그친다.


 


''엄마 이번주가 마지막 가을이 될거야. 빨리 가을을 만나러 가야해 ''라는


딸아이의 절박한 목소리에 이끌려서 피곤한 몸을 추켜 세우고 무조건 도시를 떠났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백양사 휴게소가 보이기에 휴게소를 들렸다.


 


휴게소 풍경은 언제나 설렌다.


평소 같으면 잘 먹지 않을것 같은 튀김 음식들도 군침이 돈다.


딸아이 입에 소떡 하나를 물러주고 나도 어묵을 집어 들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리운 날씨라 테이크 아웃 커피를 주문했다.


딸아이가 자기는 핫쵸코라고 외치며 일인분을 추가했다.


내 몸에 일부처럼 붙이고 다니던, 옵션같은 딸이 독립적인 한사람으로서 자신의 몫을 주장한다.


아메리카노와 핫쵸코를 각각 들고, 고칼로리의 간식을 베어 물면서 휴게소의 여유를 만끽하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엄마 오늘 어디서 가을을 만나''


 


''글쎄 어디가야 가을을 만날 수 있을까''


 


''난 빨리 가을을 만나고 싶어''


 


''어 너 옆에 가을이 와 있는데


우리 딸레미 공부하느라고 바빠서 옆에 있는 가을도 못 보고 있었구나'' 하면서 옷에 붙은 낙엽을 털어주었다.


 


''엄마 난 온 세상이 빨갛게 물들고, 바스락 소리가 나는 가을을 만나고 싶다구요.


책에서 가을은 그렇다고 했다구요.''


 


우리 아이의 가을은 책에 갖혀서 세상 구경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딸아이를 품에 가득 안아 주었다.


 


온도계 눈금속에 가두고 있던 엄마의 가을도 오늘은 세상밖으로 불러내야 할터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문득 백양사 휴게소 간판이 눈에 들어 온다.


 


광주에 내려 온지 삼년이 지났는데, 지척에 있는 백양사를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휴게소만 들려보고 근처에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오늘은 백양사를 가야겠다고 맘을 정했다.


대부분 사찰은 운치 있는 산자락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므로, 빨갛고 바스락거리는 가을을 만나기 좋을 것이란 판단에, 목적지로 정하고 달려 갔다


 


눈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사를 터뜨리며 백양사를 달려가던 중에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과 맞닥드렸다.


한쪽 차선만 길게 늘어서 있기에 차선 변경을 해서 뻥뚤린 차로를 질주 한던중, 백양사 표지판을 발견하게 되었다


 


'백양사 내장산 좌회전'


 


차량으로 길게 늘어선 차선은 우리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길게 늘어선 차들 사이로 끼어들수 없었기에, 그 길을 지나 알수 없는 목적지로 달릴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담양 표지판이 보인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딸아이와 자주 들리던 곳이다.


딸아이의 실망스러운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고속도로를 돌아 멀리 멀리 온것 같았는데 집 가까운 담양이라니.....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한 조각!


 


''아빠를 데리러 가자''


 


조금만 달리면 집이니까 일하라고 두고 온 아빠를 데리러 가자 !!!!!


집으로 간다는 말에 딸아이의 눈이 튀어 나올듯 하다.


 


딸아이 말데로 이번 주가 지나면 가을이 끝날것이다.


 


나뭇잎은 벌써 말랐고, 단풍은 절정이다.


곧 비바람이 불어올 듯 한 하늘이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앙상한 가지만 남을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오늘은 아빠에게 가을을 만나게 해줘야겠다.


 


생각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다.


 


어리둥절한 아빠를 차에 태우고 다시 무작정 도시를 빠져 나왔다.


 


이번에는 화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디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디든 가을이 넘쳐나므로 무작정 달려 나갔다.


 


얼떨결에 따라 나선 아빠는 백양사 언저리에서 돌아온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단풍이 보고 싶으면 이 시즌에는 알려지지 않는 곳을 가야 한다며 백아산에 가자고 한다.


 


네비에 백아산을 찍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이끄는 데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는길에 오지호미술관 표지판이 보이기에 핸들을 꺽어 찾아 들어 갔다.


 


동복이라는 곳이었다.


 


'해주 오씨'와 다른 본으로 '동복 오씨'가 있다.


나의 고모부가 동복 오씨다.


오씨는 본이 두개뿐이라 언제나 동복이 어디인지 궁금했었다.


 


오지호 미술관에 이끌려 간 곳이


동복이었다.


오지호 화백은 동복 오씨였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들판 사이로 작은 개천이 흐르는 곳이었다.


누군가가 본을 정하고 시조로 세울만한 기세가 느껴지는 터였다.


 


남편은 미술관 앞 머릿돌에 수북히 적혀 있는 이름들 앞에 섰다.


같이 서서 읽어 내려가 보니 아는 이름이 무척 많았다.


남편과 같이 한명씩 아는 이름들을 짚어 내려 갔다.


대부분이 함께 활동하던 작가이거나 후배 작가들이었다.


오지호 작가님의 가치를 알수 있는 사람들은 작가들일 수 밖에 없었을테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작가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미술관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했다.


 


미술관에서 그 옛날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림을 직접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오지호 화백님은 교과서 표지 그림을 직접 그리시기도 하셨다.


'많이 보던 그림이네' 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면서 한참을 뚫어져라 보게 된다.


 


추억이 송환되고 시절이 겹쳐지고 화가의 시선으로 펼쳐진 세상이 편린으로 담겨진다.


 


생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자화상이 함께 걸린 공간에서는 섬듯함이 느껴질 만큼 긴장감이 감돈다.


 


자화상속 화가의 시선이 나를 응시한다.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가 응시하는 거울속의 모습은 화가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자화상은 피할수 없는 시선으로 관객을 붙잡고, 주춤 멈춰선 관객은 작품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오지호 화백님의 자화상은 유난히도 강렬했다.


 


곰팡이 냄새 때문에 오래 미술관에 머물수가 없었다


 


다시 가을을 만나러 백아산으로 달려 갔다.


 


한적한 길을 돌아 돌아 달리다보니 범상치 않은 산새가 드러난다.


 


남편은 백아산이 마지막 파르티잔의 본거지였다고 말한다.


 


지리산에서 쫒겨온 파르티잔들이 백아산으로 숨어들면 찾을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끝까지 항쟁했고, 결국은 이곳에서 그들의 항쟁을 멈출수 밖에 없었기에 파르티잔의 성지라고 할수 있다고 했다.


 


이제 더이상 백아산이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필 우리는 피빛 성지로 가을을 만나겠다고 돌고 돌아서 달려온것이다.


 


참 눈치 없는 남편이다


 


백아산으로 접어드니 파르티잔이 왜 이 산에 의탁했는지를 알것 같았다.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에 단풍 관관객들이 많지 않았다. 한적한 산길에서 자전거 트레킹 무리를 만나고 크게 인사를 나누었다.


 


산길로 이어진 도로는 붉은 단풍 길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단풍 길을 따라 가다보니 정상이 보이는 곳에 주차장이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가을을 만났다.


 


붉은 단풍이 산 하나 가득하고,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만 들리는 산속에서 깊은 숨을 쉬어 본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한적함이다.


 


딸아이는 이 한적한 산속에서 카메라와 씨름중이다.


누가 듣는지는 모르겠으나 카메라에 대고 단풍나무와, 가을 햇날과, 낙엽지는 장관을 설명하느라 흥분하고 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카메라에 담느라 먼지를 내며 분주히 산길을 뛰어 다닌다.


 


그 또한 자연스럽다.


 


가을 햇살은 찬란했고, 붉은 단풍은 처연했다.


 


가을 한 낮은 짧았고, 단풍 시절은 한 순간이다.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매년 잊혀지는 결혼 기념 일을 맞아, 미루고 미루다가 떠나온 가족 여행이었다.


 


행사를 앞두고 신경쓸 겨를이 없더라도, 힘든 일과로 몸이 천근 만근 이라도, 아이가 기억하고 보채서 떠나온 가을 나들이는 큰 선물을 받은것 처럼 행복하고 소중했다.


 


 

오미아박사(종교예술철학)


[ 2019. 11.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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